작가가 이 소설을 처음 구상하게 된 것은 어떤 신문기사 한 줄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것은 마지막 선고공판이 있던 날의 법정 풍경을 그린 젊은 인턴기자의 스케치기사였다. 그 마지막 구절은 아마도 "집행유예로 석방되는 그들의 가벼운 형량이 수화로 통역되는 순간 법정은 청각장애인들이 내는 알 수없는 울부짖음으로 가득 찼다"였던 것 같다. 그 순간 나는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그들의 비명소리를 들은 듯했고 가시에 찔린 듯 아파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동안 준비해오던 다른 소설을 더 써나갈 수가 없었다. 그 한 줄의 글이 내 생의 1년, 혹은 그 이상을 그때 이미 점령했던 것이다.
--- 작가의 말 중에서

  거짓과 폭력 앞에서 분노하기는 쉽지만, 그에 맞서 싸우고, 죽어가는 진실을 구해내는 일은 어렵다. 작가 공지영이 그 어려운 일을 해냈다. 광주의 모 장애인학교에서 자행된 성폭력 사건 실화를 다룬 이 소설은, 귀먹은 세상이 차갑게 외면한 '진실'에 대한 이야기이자 거짓과 폭력의 도가니 속에서 한줄기 빛처럼 쏘아 올린 용기와 희망에 대한 감동적 기록이다.

  강인호는 아내의 주선으로 남쪽 도시 무진시(霧津市)에 있는 청각장애인 학교 ‘자애학원’의 기간제교사 자리를 얻어 내려가게 된다. 한때 민주화 운동의 메카였던 이 도시는 ‘무진’이라는 이름이 암시하듯 늘 지독한 안개에 뒤덮이는 곳이다. 첫날부터 마주친 짙은 안개 속에서, 그리고 청각장애를 가진 아이들과 교사들이 다수인 무섭도록 고요한 학교 분위기에서 그는 불길한 예감을 느낀다. 한 청각장애아(전영수)가 기차에 치여죽는 사고가 나도 이를 쉬쉬하는 교장, 행정실장, 교사들, 그리고 무진경찰서 형사 사이에서 강인호는 모종의 침묵의 카르텔이 작동하고 있음을 감지한다. 부임한 첫날부터 우연히 듣게 된 여자화장실의 비명소리를 신호탄으로 강인호는 점차 거대한 폭력의 실체를 알아가게 되는데...

  실화를 바탕으로 한 성실한 취재와 진지한 문제의식, 공지영 작가 특유의 힘있는 필치와 감수성은 소설의 마지막 순간까지 손을 뗄 수 없게 한다. 약자 중에서도 약자인 장애아들의 편에 서서 거짓과 맞서 싸우는 보통 사람들의 분투와 고민이 뜨거운 감동을 안겨주는 작품. 그리고 다 읽고 난 뒤에는 이 현실에 대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우리사회의 극단적인 이면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작가는 우리사회에 잠재되거나 우리가 부끄러워하고 애써 외면하려는 거짓과 폭력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진실을 똑바로 보게끔 만든다.



  장경사로서는 사실 이들의 행보를 불안해하던 참이었다. 신고가 접수되었다는 통보를 하고도 경찰측에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말미를 주었을 때 회유를 하든 합의를 하든 하다못해 깡패라도 동원해서 협박을 한 후 어디론가 쫓아 없애버리든 사안을 마무리했어야 했다. 그러나 역시 오래된 권력은 나태해진다. 그건 어쩔 수가 없는지 그들은 그저 어제처럼 오늘도 아무 일 없을 거라는 생각에 아무 대비도 하지 않은 듯했다. 그토록 힌트를 주었건만 이제 그로서도 더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오랜 경험을 가진 그로서는 늘 하는 생각이었지만 나쁜 놈들이 아니라 어리석은 놈들이 수갑을 찬다. 맹수는 다리를 다친 사슴 한 마리를 잡을 때도 결코 방심하지 않는법이다.


  두 형제는 겁먹은 얼굴로 장경사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장경사는 그러나 조만간 다시 이런 처지가 역전되리라는 것을 계산하고 있었다. 세상은 동화처럼 그렇게 녹록지 않은 것이다. 지금은 그들이 어린아이처럼 그의 바짓단을 붙들고 있지만 이 계절이 끝나면 지나온 긴날들처럼 앞으로 많은 날들을 그들은 그 앞에서 지폐를 흔들며 거만하게 굴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번 기회에 자신이 그들의 은인이라는 것을 각인시켜야 했다.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인간들보다 우월할 기회는 거의 없다. 아니 동등할 기회조차 거의 없다. 이것이 현실이었다.


  가진 자가 가진 것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는 에너지는, 가지지 못한 자가 그것을 빼앗고 싶어하는 에너지의 두 배라고 한다. 가진 자는 가진 것의 쾌락과 가지지 못한 것의 공포를 둘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진 자들이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거짓말의 합창은 그러니까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포함하고 있어서 맑은 하늘에 천둥과 번개를 부를 정도의 힘을 충분히 가진 것이었다.